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에다 아키라 (문단 편집) == 제1차(구)UWF, 신일본 복귀 == 1984년에 신일본 프로레슬링의 새로운 에이스로 활약하다 1984년 신일본을 떠나 제1차(구)UWF(우라타 노보루 사장)에 참가 사야마 사토루의 영향에 의해 킥과 관절 기술을 중심으로 한 격투기색이 강한 파이트 스타일(후에 UWF 스타일이라고 불린다.)이 전개되지만, 격투기 경기는 한달에 한번 다시 말한다 "경기 지향"의 사야마와 회사가 힘드니까 경기를 늘린다고 "흥행 지향"마에다가 대립해 이단체는 해산 사야마 사토루와 대립했지만 후의 제2차 UWF 링스는 사야마 사토루를 실천하고 있으며 서로의 행선지는 가까운 곳에 있었다. 1985년 12월 6일 [[후지와라 요시아키]], 키도 오사무, 타카다 노부히코, 야마자키 카즈오와 함께 업무 제휴라는 형태로 신일본으로 재입단하였고 마에다는 링 위에서 "1년 반 UWF로 해온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왔어요"라고 마이크 어필했다. 1986년 4월 29일 미에현 츠시 체육관에서 새로운 일본 측의 불가해한 일대일 시합에서 앙드레 더 자이언트 팀. [[시멘트 매치]]라고 말하지만, 마지막에는 앙드레가 경기를 포기해 버려, 26분 35초만에 노 콘테스트로 끝난다. 6월 12일에는 [[후지나미 타츠미]]와 경기하여 양자 KO 무승부로 종료. 이 시합은 서로의 스타일을 초월한 명승부로 일컬어진다. 그해 10월 9일 양국 국기관에서 열린 "INOKI투혼 LIVE"에서 돈 나카야 닐센의 "이종격투기전"을 편각 굳히기(싱글 보스턴 크랩)로 승리. 이 경기를 마당에 "새격투왕"으로 불리며 프로레슬링계 의외로부터도 주목을 받게되었다. 같은 날 메인이벤트에서 이종격투기전을 행한 안토니오 이노키와 비교되었는데 마에다는 결과와 시합내용 모두 이노키에게 압승. 이 경기에 대해, 훗날, 닐슨은 "여기는 이렇게 그 다음은 이렇게와 물을 잡은 것은 없다. 하지만 내가 말한 것은 "경기를 북돋워 주었다"라는 것. 그리고 1R에 좋은 펀치가 들어섰는데 두 번째에 "얼리 녹아웃은 안된다"라고 말했다"과 프로레슬링 잡지 『kamipro 』에서 증언했다. 이날 이후로 신일본 내에서의 마에다의 인기는 절대적으로까지 보였다. 하지만 신일본과 [[UWF]] 간의 항쟁이 소강상태에 이를 즈음, 1987년 6월 12일 양국 국기관에서 마사 사이토를 누르고 초대 IWGP 헤비웨이트 챔피언에 오른 안토니오 이노키가 누구의 도전이든 받겠다는 내용의 마이크 어필을 하였는데 이에 [[후지나미 타츠미]]와 마에다 아키라를 비롯한 메인 이벤터 선수들이 링에 올랐다. 이때 재팬 프로레슬링 해체 후 신일본에 다시 복귀한 [[초슈 리키]]가 마이크 어필로 타도 이노키를 외치며 세대 투쟁을 부르짖고 마에다와 초슈, 후지나미가 이노키를 잡기위해 뉴 리더군을 결성. 8월 19일에는 초슈, 후지나미, 기무라 켄고, 슈퍼 스트롱 머신과 태그로 나우 리더군과 5 대 5 제거 경기를 가져 승리. 이 경기에서 마에다는 이노키와 함께 동반탈락을 하면서 팀의 승리에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이노키를 제거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초슈의 일방적인 뉴 리더군 해산 선언으로 뉴 리더군은 해산되고 말았다. 같은 해 11월 19일 고라쿠엔 홀에서 UWF 군단 대 유신군의 6인 태그매치에서 키도 오사무에게 전갈 굳히기를 시도하던 초슈에게 마에다가 기습적인 안면에 킥을 먹이고 전치 1개월의 부상을 입혔다. [[마에다 안면축격사건]][* 1987년 11월 19일, 코라쿠엔 홀에서 열린 UWF군 대 유신군의 6명 태그 매치에서, 전갈 굳히기를 걸고 있는 쵸슈 리키의 뒤에서 다가와 쵸슈의 안면에 정통으로 킥을 날려버린다. 이 결과로 쵸슈 리키는 오른쪽 이마 동저 골절, 전치 1개월의 중상을 입게 되고 신일본 프로레슬링은 마에다 아키라에게 무기한 출장 정지의 처분을 내리며, 이루 신일본 프로레슬링은 출장 정지를 풀어주는 조건으로 멕시코에 원정을 가라고 했지만 마에다 아키라는 그 제안을 거부했고 결국 1988년 2월 1일에 신일본 프로레슬링으로부터 해고통지를 받아 그의 신일본 커리어는 끝나는 사건이었다. 마에다는 이 사건의 진위에 대해서는 말을하지 않고 있으나, 피해자인 초슈 리키와는 최근 흥행에서 화해했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마에다, 초슈(한국이름 곽광웅) 두 선수 모두 재일 한국인이다. 하지만 사야마 사토루와는 아직 화해하진 못했다.] 이것을 이유로, 신일본 프로 레슬링은 마에다에 무기한 출전정지처분을 내렸다. 그후, 출장 정지 해제의 조건으로, 멕시코 원정하는 것을 지시했는데 이를 거부한 데 따른 1988년 2월 1일에 신일본 프로 레슬링에서 프로 레슬링도에 어긋나는 행위를 이유로 해고된다. 후에 마에다는 프로 레슬링 잡지 "G스피리츠"에서의 인터뷰에서 전 일본 프로 레슬링에서의 덴류·와지마전의 충격에 대항하기 위해 안면 차기를 시도했지만 초슈가 얼굴을 돌려 버림으로써 사고에 이르러 버렸다고 증언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